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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가 작가 한강에게 당신의 첫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물었을 때 작가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추천했다. 이 책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고백하건대  4·19 혁명, 5·16 군사 정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내가 태어난 후 일어난 사건들로 많이 보고 듣고 배워왔지만, 제주 4·3 사건은 왠지 멀고 아득한 역사 사건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3만 명의 주민이 무자비하게 희생당한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물론 이 사건이 궁금해서 구글에 검색해 보면 순식간에 필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문학에는 혼이 있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다시 한번 문학의 위대함을 피부로 느끼고 작가의 섬세함과 예리한 필력에 고개 숙이게 된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참혹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한강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처럼 극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 시기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기쁨에 들떠있었지만 당장 정치나 이념보다 먹고 살아갈 방법만이 최대의 관심사이었던 때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최고에 달했고 정부 수립의 혼란을 틈타 러시아는 마르크시즘, 스탈린주의로 우리나라를 통째로 공산국가로 만들 셈이었다. 힘없는 우리 민족은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하지만 그 어떤 폭력과 공포만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그들이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사랑이었다.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그리고 보호해야 한다는 뜨거운 가슴이 없었다면 그들은 무너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그녀는 작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소설은 화자인 경하가 꾸었던 꿈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눈 내리는 벌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마치 묘비처럼 등성이까지 심겨있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생각하며 나무들 사이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운동화에 물이 밟혀 돌아보니 지평선인 줄 알았던 곳이 바다였다. 봉분 아래 뼈들이 쓸려가 버리기 전에 뼈들을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어 당황하면서 꿈에서 깬다. 경하는 이 꿈 이야기를 사진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연출가이며 예전에 자신이 잡지사 근무 시절부터 동갑내기 친구였던 인선에게 말하자 인선은 그것을 프로젝트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자고 약속한다. 어느 날 경하는 인선이 제주도에서 목공예 작업 중 손가락 절단 사고를 겪고 이를 접합하는 수술을 위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와 있는데 방문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는다. 병원에서 인선은 경하에게 제주도에 있는 자기 집에 가서 자신이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는 앵무새를 돌봐달라고 간곡하게 다시 부탁한다. 예전에 한번 가본 기억을 더듬어 그날로 경하는 인선의 집으로 가지만 폭설로 인해 심한 어려움을 겪는다. 막상 도착하니 앵무새는 이미 죽어있고 거기서 경하는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였던 인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인선은 그동안 4·3 사건 피해자들의 인터뷰 내용과 사진,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프로젝트를 위해 나무 목공예 작업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온 가족을 잃게 된 인선 어머니와 인선은 어느 날 강둑에 앉아 있는데 엄마가 인선의 뺨을, 뒷머리를, 어깨를, 등을 쓰다듬는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한강은 이 책을 ‘지극한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인선은 어머니의 삶이 자신에게 스며오는 것이 고통스러우면서도 그 사랑을 외면하지 못하고, 경하 또한 인선의 마음이 힘겨우면서도 내치지 못하는 그 사랑, 그 사랑에 밀려 기어이 고통을 택하는 것이 오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말한다. 한강은 한국이 낳은 앙가주망의 대표 작가다. 메마르고 재미없는 역사 이야기도 그녀를 통하면 가슴 시리고 섬세한 이미지와 시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문체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작별 인선 어머니 가족 이야기 화자인 경하

2025-03-10

[삶의 뜨락에서] 신세를 졌어요

오래전 베를린 마라톤에 참가했던 친구들을 플러싱에서 만나기로 했다. 뉴저지에서 버스를 타고 한양 슈퍼마켓 앞에서 내리면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반가웠다. 암 투병으로 아팠던 친구는 건강해 보였고 멋쟁이 친구는 여전히 젊음이 넘쳐흘렀고 열심히 일하는 친구는 오늘따라 여유가 있어 보였다. 플러싱 먹자골목을 다니면서 구경도 했다. 음식점에 앉았는데 손님들이 주문한 음식을 로봇이 왔다 갔다 하면서 운반해준다. 로봇이 직원들의 손을 대신했다. 음식도 맛있고 양도 많았다. 뉴저지 식당에서 느끼지 못했던 콩나물도 아삭아삭하고 양념도 느끼하지 않고 생선도 많이 들어있고 생선 자체 맛이 일품이었다. 4명이 먹고 많이 남았다. 내가 가지고 가기로 하고 식대를 계산하려고 하니 벌써 다른 친구가 내 버렸다. 커피숍에 갔는데 한 친구가 계산대 앞에 서 있으면서 맛있는 빵을 골라오라고 손짓한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하다가 한 친구가 일터로 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셋은 발 마사지하는 곳으로 향했다. 1시간 발 마사지를 해주는데 어머 좋은 것. 장딴지부터 발가락 하나하나 문지르는데 피로가 확 풀리고 발이 보드랍다. 꺼칠꺼칠했던 발바닥이 어린아이 살결처럼 부드러워졌다. 움츠리고 일어나 기분 좋게 계산대로 다가갔는데 다른 친구가 벌써 계산을 해버렸다. 온종일 즐기면서 한 푼도 내지 않아서 먹먹했다.   신세 지기 싫다. 빚지고 사는 일은 불편하다. 받았으면 돌려줘야 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잘 받는 게 어려웠다. 겉으로 티 내지 않아도 이런 마음을 갖고 살았다. 나는 언제나 갚아야 할 일들이 남아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래서 무엇이든 공짜로 받으면 불편했다. 공짜여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격표가 붙어있는 것 같다고 할까. 갚아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작은 호의가 호의로 다가오지 않는다. 친구 눈에는 그 모습이 보였던 것 같다. 티가 났느냐고 물어봤더니 다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하루 이틀 볼 것도 아니고 이번에 못 내면 다음에 내면 되지 뭐.   지금의 세상은 호의 대신 편의를 요구한다. 의도나 숨겨진 목적 없는 호의 대신 목적이 선명한 편의를 제공하게끔 변해가고 있다. 세상살이가 각박할수록 더 그럴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면 호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분명한 목적은 마음을 의심하게 한다. 그렇지만 호의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유를 가지라는 조언은 가당치 않다. 그게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여유를 가지기란 어렵지만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은 바꿔볼 수 있다. 받았다는 사실보다 친절한 마음씨에서 시작되었다는 의도를 기억해 보는 건 가능하다. 중요한 건 친절에서 비롯한 마음이다.   나는 그래서 마음의 출발지만 기억하기로 했다. 일생은 길고 유별나게 굴 필요는 없다. 딱 맞게 떨어지는 관계는 없다. 더 줄 때도 있고 덜 받을 때도 있는 법이다. 주고받는 과정에 익숙해지면 그냥 그 자체로 좋지 않을까. 돌려줄 마음이 빈한해 옹색한 모양새가 부끄러울지라도 가까이 받아들이기를 선택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는 갚는 일이 싫어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오고감에 익숙해져야 한다. 무뎌져 익숙할수록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시간은 관계에서 의미 있던 순간들도 희미하게 만드니까. 다음에 친구들을 만나면 꼭 밥을 사야겠다. 헤어지면서 작년에 아카시아 꽃을 넣어 만든 와인을 한 병씩 주면서 무슨 향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넌지시 숙제를 주었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신세 멋쟁이 친구 호의가 호의로 신세 지기

2025-03-05

[삶의 뜨락에서] 노인의 시 공부

은퇴한 후, 치매 예방에 좋을 것 같아서, 시를 쓰고 싶었다. 내가 늙었기에, 내 두뇌 또한 늙었다. 두뇌가 늙었는데 시를 쓸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을 해보았다. 이때 바로 일본의 시바타 도요라는 할머니의 시가 유행되었다. 시바타는 9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100세에 시집을 발간했다. 그 시집이 일본에서 100만 권 이상 팔렸다. 한국에도 그녀 시집이 번역되어 많이 읽혔다. 시바타를 보고서, 두뇌가 늙었어도 시를 쓰는 데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테의 수기’에서 독일 시인 마리아 릴케는 말했다.     “젊어서 시를 쓴다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 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감정이 아닌 것이다. (감정이라면 젊었을 때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시는 경험인 것이다. 한 줄의 시를 위하여 도시와 온갖 사람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물을 알아야만 한다…. 추억이 많아지면 추억 또한 잊혀야 한다. 그 추억이 우리의 피가 되고, 눈이 되고, 몸짓이 되고, 이름도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마침내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 없게 됨으로써, 아주 우연한 순간에 한 편의 시의 말이 솟아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늙어오는 동안 많은 경험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시를 쓸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동네 미국 도서관에 가 보았다. 한국소설이나 수필 책은 수두룩하게 많아도, 시집은 단 한권도 없었다. 그래도 이리저리 시집을 구해서 많이 읽었다.   막상 시를 쓰려고 하니까 전연 써지지 않는다. 시를 쓰는 데 있어서, 경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첫째 시를 쓰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있어야 한다. 그에 따른 사색(思索)이 있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안 된다. 시를 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소수의 천재는 배움 없이 시를 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시 쓰는 방법을 꼭 배워야 한다. 배우기 위해서, 시 선생을 찾았다. 뉴욕에는 시를 가르치는 학교나 학원이 하나도 없었다.     2017년, 내 나이 80. ‘중앙일보 문학 동아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해서 참여했다. 김정기 선생님을 만났다. 시 작법을 배웠다. 많은 시간을 시 공부에 열중했다. 시라는 게 배운다고 해서 쉽게 써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또 알았다. 운동선수들이 매일 고된 연습을 하는 식으로, 시 또한 매일 써보고 또 써보면서, 고치고 또 고쳐가면서 실력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시인 나태주는 “산문은 작정하고 쓸 수 있지만, 시는 작정하고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시는 내가 쓰는 게 아니고, 시 자체가 쓰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시상(詩想)은 뜬금없이 저절로 떠오른다. 떠오른 시상은 금방 없어진다. 없어지기 전에 얼른 종이에 적어놓아야 한다. 한번 사라지면 다시 기억해내기 어렵다. 종이에 적어놓은 시상을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또 수정한 후에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써놓은 시를 아내한테 읽어보라고 한다. 아내가 좋아할 때까지 혹은 내가 만족할 때까지 시를 고치고 수정한다. 시를 쓰다 보면 짜증도 나고 골치도 아프다.     그런데 다 써놓은 후 완성된 시를 읽어볼 때의 기분은, 마치 높은 산 정상에 도달했었을 때의 만족감이다. 조성내 / 시인·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삶의 뜨락에서 노인 공부 그녀 시집 시인 나태주 김정기 선생님

2025-02-20

[삶의 뜨락에서] 여보, 내 시를 읽어줘!

“여보, 내 시를 읽어줘”하고 부탁한다. 내 시가 좋다고 생각되니까, 아내한테 읽어보라고 한 것이다. 대개의 경우 아내는 ‘오케이’ 하고서 내 시를 읽는다. 그런데 아내의 기분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내도 바쁘다. 아내도 해야 할 일이 많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도 있다. 이럴 때는 아내도 크게 반발한다. “여보, 나는 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게다가 나는 시에 대해 전연 흥미도 없어. 당신이 시를 좋아하면 당신 혼자 시를 써. 왜 나를 못살게 굴어! 못살게 굴지 마.” 그리고는 내 시를 안 읽겠다고 거절한다.     아내를 달랜다. “여보, 당신이 나에게 부탁하면, 나는 얼른 당신의 부탁을 다 들어주었어. 그런데 당신은 내 부탁도 안 들어준다는 거야. 무정한데!” 그러고는, 아내 곁에 내 시를 놔두고 나는 아내 곁을 떠난다.     다행히도 아내의 짜증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내는 내 시를 읽는다. “내 시가 안 좋다”고 평한다. 나는 아내가 내 시를 읽고서, “아, 이 시, 아주 좋은데”하고 평해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내 시가 나쁘다고 말한다. 내 속이 확 상한다. “어디가 나쁘단 말이야? 지적해줘” 하고 화낸다. 아내의 지적을 듣고 있으면, 내가 화가 나 있어도, 그래도 아내의 지적이 옳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아내의 지적이 맞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해준다. 고맙다는 나의 말을 듣고서 아내도 기분 좋아한다.     시를 써놓은 후, 나 혼자서 내 시를 읽어본다. 어떻게 보면 내 시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내 시가 나쁘게 보인다. 문제는, 내가 내 시를 읽어보고, 내 시가 ‘좋다’ ‘나쁘다’ 하고 스스로 평가할 만큼 내가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력이 부족하니까, 나는 아내의 평에 의존해야만 한다. 다행히도, 세월이 흐를수록 시에 대한 안목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그래도 앞으로도 아내의 지적을 나는 계속 받을 것이다.   나는 ‘중앙일보 문학동아리’ 회원이다. 가끔 시(詩) 모임이 있다. 모일 때마다 회원들은 시 한 편씩 써서 가져온다. 돌아가면서 각자 자기 시를 낭독한다. 낭독한 후, 어떤 동기로 시를 쓰게 되었다는 등, 어떤 메시지를 독자에게 주고 싶다는 등, 각자 자기 시에 관해 설명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시를 읽고 난 후, 다들 “그 시 참 좋네요.” 하는 평을 듣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좋다는 평을 듣지 못하면 섭섭해한다. ‘좋지 않은 점’을 지적해주면, 자기를 ‘욕하고 있다’고 오해해서 화를 내기도 한다. 심지어 싸우려고 달려들기도 한다. 그러니, 회원들은, 남의 시의 나쁜 점을 지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말로만 ‘좋네요’하고 간단하게 평해버리고 만다.     그러니, ‘좋다’는 말만 들으니, 다들 좋아한다. 좋아하는 거야 좋다. 그런데 빈말로, 좋다고 하는 평을 듣고서, 진짜로 자기 시가 좋아서 좋다고 한 걸로 오해해버릴 수가 있다. 그러면 자기도취에 빠진다. 자기도취에 빠지면, 어떻게 발전을 이룩해갈 수가 있단 말인가? 자기 시의 나쁜 점을 가끔은 비평받아야만 시(詩)가 발전해갈 수 있는 것이다.     다음 모임부터는, “나는 결코 화내지 않을 테니까, 내 시의 나쁜 점을 허심탄회하게 비평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해야겠다. 조성내 / 시인·의사삶의 뜨락에서 자기 시가 중앙일보 문학동아리 다음 모임

2025-02-11

[삶의 뜨락에서] ‘희랍어 시간’을 읽고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읽었다. 오래전에 사서 읽다가 재미가 없어 중간에 덮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고 꾸준히 책을 읽어온 덕택에 이번에 읽은 이 책은 한강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난번에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독후감을 ‘조용한 천재’라고 명명한 후 이 자리에 글을 올렸었다. 이번에 이 책을 읽고 과연 한강은 한국이 낳은 천재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지금까지 세계적 명작이면서 고전으로 알려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톨스토이의 ‘부활’ ‘안나 카레니나’를 보아도 작품 대부분은 장편이다. 명작에서는 등장인물에 대한 심리묘사, 성격묘사, 그리고 주위 배경 묘사가 얼마나 섬세하고 구체적인지 마치 독자는 자신이 그 이야기 속의 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다. 반면 다루는 사건의 기간은 놀랍게도 매우 짧다. 그만큼 문장을 늘려서 생동감과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작가의 문장력과 역량이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한편 한국 작품은 뼈대는 건장한데 영양 상태가 빈약하다. 한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전후의 배경과 묘사와 표현 방식은 작가의 실력에 달려있다. 우리는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한국 문학사에 숨어있는 천재를 발견한 것이다. 한강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묘사를 시적이며 서정적이면서도 깊이 있게 함축하여 독자에게 상상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놓는다. 한강의 언어에 대한 호기심, 관심 그리고 사랑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우리처럼 학교에서 국어 시간에 배운 모국어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부류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네 살 때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고 한다. 아직 자음, 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를 통 문자로 외웠다니 과히 놀랄만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고 후에 그 단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을 만들었다. 거기에 쓰인 단어들이 수시로 잠을 뚫고 들어와 그녀의 명치를 눌렀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소름 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17살이 되던 겨울,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그녀를 에워싸고 그녀는 말을 잃게 된다.     이 소설은 이렇게 말을 잃어버린 여자와 눈이 멀어져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남녀 모두 각자 깊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삶을 견뎌내던 중 희랍어 강사인 남자와 수강생으로 만나게 된다. 그 둘은 어느 날 희랍어 교실로 향하던 중에 빌딩 지하실에서 사고로 생명줄과도 같은 안경을 잃어버리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말을 잃은 그녀가 시력을 잃은 그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 그를 그의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주면서 그녀는 그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그 둘은 남자의 작은 방에서 서로 소통하며 공감하며 치유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이토록 우아하게 묘사할 수 있는가 완전 감동이다. 언어에 그토록 예민한 작가는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사실에 자신의 혀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말 외에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 침묵 속에서 상상 속에서 인간의 혼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도움을 주고받고 서로 보완해 가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 아닌가. 세상은 이제야 그녀를 알아본다. 이제 그녀는 활짝 꽃피울 일만 남았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희랍어 시간 희랍어 시간 희랍어 교실 국어 시간

2025-02-10

[삶의 뜨락에서] 특별한 음식 맛을 내는 사람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대여섯 친구들 모임이다. 그중에 한 친구가 죽기 전에 딱 한 끼만 먹을 수 있다면 무엇을 먹고 싶으냐고 묻는다. 말하자면 소울 푸드인 거지. 너도나도 한 가지 음식을 꺼내기 시작하자 나는 한 발짝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우리가 말한 소울 푸드의 스토리 대부분은 그 안에 엄마나 할머니가 등장했다. 우리 엄마가 가장 잘하는 메뉴가 돼지 두루치기야. 내가 언제 한 번 엄마한테 이거 단일 메뉴로만 식당을 차려도 동네 식당을 다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한 적 있다니까. 나는 우리 할머니가 어릴 때 직접 끓여주신 단팥죽 맛을 못 잊어. 할머니랑 같이 살았거든. 내가 학교 갔다가 오면 할머니가 갈치조림도 해 주고 수제비도 해 주고 진짜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해 주셨는데 나는 그중에 단팥죽이 그렇게 맛있는 거야. 다른 집 애들은 동지나 어떤 특별한 날에만 먹잖아. 나는 허구한 날 단팥죽 타령을 했던 거지. 우리 집은 그냥 가족이 다 잡채를 좋아해. 그래서 우리 동생이랑 나는 중학교 때 엄마 아빠 두 분 다 어디 가셔서 안 계시고 우리 둘만 밥을 먹어야 했는데 둘이서 잡채를 해 먹었어. 맨날 엄마가 하는 걸 봤으니까 어린 나이라도 그 메뉴는 너무 능숙한 거야. 잡채가 왜 맛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우리 집은 당면이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는 것 같아.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우리 집은 당면에 간장만 부어도 좋아할걸. 죽기 전에도 아마 잡채를 먹고 있을 거야.     왠지 실제로도 그럴 만큼 그 정도로 좋아한다는 표현이라 너무 와 닿았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된장에 고춧잎을 넣어 삭힌 고추와 고춧잎이 제일 먹고 싶다고 말했다. 50년 전 한국 식품점도 없었는데 딸을 임신하고 입덧을 심하게 하면서 그 고춧잎이 먹고 싶어 누워 있으면 천정에 고춧잎과 고추가 그림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뉴욕마라톤에서 만난 지인이 김치를 김치 통에 가득 담아 주었다.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받아먹기가 조금 망설였다. 마켓에서 사 먹는 김치와는 전혀 다른 맛과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배추가 아삭거리고 배추 잎 사이사이에 들어간 양념이 달랐다. 파, 마늘, 무, 갓이 대충 보기에는 마켓 김치와 다르지 않았는데 씹히는 감촉이 달랐다. 살짝 물어보았다. 어떻게 담았기에 특별한 맛이 배어 있느냐고. 무엇하나 빠지지 않고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손으로 다듬고 어루만지면서 골고루 양념을 섞는다고 쉽게 말한다. 설탕 대신 배와 홍시를 갈아 넣고 무, 파, 마늘, 갓은 직접 채소밭에 씨를 뿌려 가꾼 유기농 농산물이었다. 한 포기를 아껴 두었다 식구들이 모이는 설날 가지고 갔다. 떡국과 같이 먹으면서 떡국보다 김치 맛이 독특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같은 양념에 똑같은 배추로 김치를 담그지만 맛이 다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음식을 잘하는 사람들은 양념과 배추의 조합을 특이한 감각으로 잘 맞추고 고춧가루도 보기 좋고 맛깔나게 배합을 잘하는 것 같다. 그리고 간을 기가 막히게 잘 맞춘다. 소금으로 절이는 것도 시간과 배추 상태를 잘 파악하는 재치가 있다. 신경 쓰고 손맛까지 곁들이니 어찌 기이한 맛이 우러나오지 않겠나. 우리 친구 중에 농사를 기가 막히게 잘 지어 고추, 상추를 잘 얻어먹었다. 지금까지 농사와 음식 솜씨는 제일이라고 믿고 있었고 상추를 이모작을 해서 6월까지 밥상에 올라왔는데 이 지인은 상추를 3모작 하여 11월까지 상추를 먹는다고 했다. 3모작 상추 맛은 2모작과 맛이 조금 다를까.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음식 배추로 김치 음식 솜씨 고추 상추

2025-02-03

[삶의 뜨락에서] 여자들이 돌아온다

“여자들이 돌아온다. 멀리 영원으로부터” 돌아온 여자들이 외친다. “때 이른 여자들인 우리, 문화에 억압된 자들인 우리, 입마개로 차단된 아름다운 입들, 꽃가루, 숨결, 미궁, 사다리, 짓밟힌 공간인 우리, 도둑맞은 여자들인 우리- 프랑스 페미니즘 대표 사상가, 작가, 교수인 엘렌 식수(Helen Cixous, 1937~)는 산파인 어머니를 따라 출산하는 여성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고 고백한다. 그녀 자신이 임신해 출산한 경험은 ‘글쓰기’라는 생산 행위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적 글쓰기’의 바탕에 아이를 품어 낳는 경험이 녹아난 것이다.     그녀는 1969년에 유럽 대학에서 최초로 ‘여성학’을 개설했다. 그녀는 여성의 창조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과 예술작품의 창작을 촉진하였고 여성의 주체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학문적이고 문학적인 논의를 끌어냈다. 많은 여성 정치인, 여성 경영인들이 있지만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여성 해방운동을 주도한 페미니스트다.     나도 태어나 보니 여자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속 선택하고 그 선택은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성별을 선택할 수도 없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남성우월주의가 만연할 때여서 한 가정에서 아들은 특별 대우를 받고 자랐다. 음식이 귀하던 시절, 아버지나 아들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면 어머니는 밥을 미리 퍼서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두었던 추억을 누구나 갖고 있다. 어머니와 딸들은 아들의 성공을 위해 희생과 협력으로 사회의 기성 질서를 지키는 수호신이 된다. 그들은 당신의 여성성을 주장할 엄두도 못 내고 가부장적 사회 질서에 감염되어 그 기성 질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졌다.     이런 부당한 성차별은 나의 대학 시절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 당시만 해도 여자가 대학에 가서 커리어우먼이 되기보다는 격에 맞는 남자를 만나기 위한 경우가 더 많았다. 당연히 여자들은 화장하고 옷을 잘 차려입고 다양한 머리 모양으로 한껏 멋을 내기 바빴다. 난 그런 상황이 너무 싫었다. 인간의 뇌세포가 가장 활발한 20대 초반에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에 어떻게 시간 낭비, 돈 낭비, 에너지 낭비를 한단 말인가. 자신을 잘 보이게 치장해서 쇼윈도에 진열해 놓고 주인을 기다리는 애완견 같았다.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화는 나의 시그니쳐였다. 그리고 남몰래 미국에 와서 성전환 수술을 해야겠다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대학을 마치고 바로 미국에 왔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고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진화되었다. 여자는 집에서 해왔던 육아와 가사 일에서 많이 해방되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 생활은 편리하고 간편해졌다. 일찍 깨우친 여성 운동가들이 나왔고 남녀평등을 주장함으로써 여성 참정권도 얻었다. 이제는 자유경쟁 시대다. 이제는 성차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시대다. 그동안 남성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정치, 경제, 사회적 지위에도 여성의 지위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향상되었다. 우선 여성 대통령, 총리, 정치가, 대기업 총수 그리고 의사, 변호사는 과반수가 여성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아선호 사상은 고대부터 존재해 왔다. 수렵과 농업 시대에서는 신체적으로 강한 남성이 여성위에 군림해 왔다. 점차 문명이 발달하면서 종족 번식과 가계의 대를 잇는다는 이유로 남아선호사상은 늘 우세했다. 다행히 지금은 남녀평등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기회는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졌다. 1970년대에는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차별과 편견이다. 그동안 나는 여자로 태어나 많은 불이익을 당해왔다고 믿었었다. 이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여자이기에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 고맙게 생각한다. 이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여성들이여 힘내라. 유리천장을 깨고 훨훨 날아라”라고 외치고 싶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여자 여성 해방운동 여성적 글쓰기 여성 참정권

2025-01-27

[삶의 뜨락에서] 준비해놓은 후 가는 게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34쪽)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에 써진 한 토막의 시(詩)다. 위의 구절이 힘차게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그래 맞아,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났단 말이야. 그리고 아무런 훈련 없이 죽어갈 거란 말이야. 나는 여러 번 이 말을 중얼거렸었다.     일이년이 지난 후, 다시 이 시집을 읽고서, 또 이 구절에서 나는 다시 사색하기 시작했다.   실은, 우리는 태어난 것조차 모르고 태어났다. 자라면서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왜 태어나야 했었는지? 왜 살아야만 하는지도 모르면서,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니까, 계속 살고 있다. 자발적으로 살고 있는지? 혹은 수동적으로 살아지고 있는지? 모르면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35쪽)고 쉼보르스카는 말했다. “사라진다”는 게 아름답다니? 이 말이 사실일까?     살아있는 것이 만약 죽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살아있는 것들로 꽉 차버릴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로 꽉 차버린다면?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한다. 그렇다면 사악하고 잔인한 일만 남아 있다. 그것은 서로 죽이기다. 혹은 굶어 죽기다. 그래서 살아 있던 자가 죽어 사라짐을 보고, 쉼보르스카는 ‘아름답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이런 잔인함을 피하고, 지구를 살리고, 후손을 위해서, 때가 되면 나도 너도 우리는 죽어주어야만 한다.   태어남과 죽음은 윤회한다는 게 불교이다. 이 세상에 한 번만 태어난 게 아니다.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수없이 태어난다. 쉼보르스카는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고 말했는데, 극히 소수지만, 후생(後生)을 위해서 “미리 준비를 해놓은 후” 죽는 사람들도 있다.     부처는 태어남은 고통이라고 했다. 태어나면 늙어야 하고, 병 들어야 하고,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도를 닦으라고 했다. 말이 쉽지, 도를 닦는다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생(生)에서 조금 닦고, 또 다음 생에서 또 조금 닦고, 그러면 어느 생에선가는 도를 깨치게 된다. 하지만, 도를 깨치지 전에는, 모든 생물은 죽으면 다시 태어나니까, 다시 태어날 바에야, 다음 생에서는 좋은 복을 많이 갖고 태어나면 좋지 않겠는가!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살생·도둑질·간음·거짓말 등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부처는 말했다. 남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명문대에 가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가. 대학생이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싶으면 열심히 일하지 않는가. 가는 곳을 알고서 졸업하는 게 좋지 않은가. 계율을 지키고 선행(善行)을 많이 행한 사람들은, 죽음 후, 자기가 가기를 원한 곳에서 태어난다고 부처는 말했다(잡아함경). 재벌 집에서 태어나고 싶으면, 재벌 집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당신도 좋은 복을 듬뿍 갖고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다. 어디로 가는가를 미리 준비해놓은 후,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좋은 곳에 가고 안 가고는, 당신한테 달렸네요! 조성내 / 수필가·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삶의 뜨락에서 시인 비스와바쉼보르스카 노벨문학상 수상자

2025-01-20

[삶의 뜨락에서] 사랑을 담은 공간

‘빛이 이끄는 곳으로’ 백희성의 장편 소설을 읽었다. 작가이자 건축가인 그는 10여년간 파리에서 건축가로 활약하면서 ‘기억을 담은 건축’을 소재로 사람들의 추억과 사랑으로 완성되는 공간을 꿈꾸며 새로운 의미의 공간을 제시한다.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기품 있고 역사성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집 우편함에 ‘저는 건축가입니다. 당신의 집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가능하시면 연락 바랍니다’라는 노트를 적어 넣는다. 그렇게 그는 파리의 저택 주인들로부터 답장을 받아 초대된 자리에서 그 집에 간직된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동안 인터뷰와 자료수집을 마친 후 8년 만에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다. 건축가이면서 작가인 그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으로 탄탄하게 엮어간 아주 특별한 가족의 사랑 이야기이다. 건축물이 단지 건축가로서 건축물을 짓고 이득을 남기는 사업 이상으로 그 공간에 사랑을 담고 키우고 전달하는 인간다움의 터전임을 일깨워 준다. 사랑하는 마음을 공간에 담아내는 건축가라는 직업이 한층 매력적이다.     작가는 빛과 기억이라는 경이로운 설계로 실화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건축가인 주인공은 평범한 직장인의 봉급으로는 살 수 없는 파리에 있는 시테 섬의 유서 깊은 저택을 자신이 건축가이기에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집을 계약하기 위해 집주인을 만나러 스위스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간다. 그 요양병원은 부서진 중세 수도원을 개축해 지은 건물로 독특한 매력이 있고 우연하게도 그가 방문한 날에 기이하고 환상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어두컴컴한 오래된 건물에 압도적인 빛의 향연이 펼쳐지며 건물에 감춰져 있던 비밀의 단서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건축가였던 아버지는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여기저기 남겨 놓는다. 아들도 이제는 나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고 시간이 없다. 스위스에 있는 요양병원과 시테 섬의 저택에 숨겨진 비밀은 건축가가 아니면 밝혀낼 수 없는 전문적인 추론이 필요했고 결국 주인공은 건축가로서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모든 감각을 동원해 치열하고도 필사적인 노력으로 비밀을 밝혀낸다.     작가가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으로 설정한 아버지, 프랑스와 왈처는 전쟁 후 보상금으로 이 저택을 구매한 후 집 밖에서 떨고 있는 그 집 전 안주인인 아나톨을 가엽게 여겨 집으로 데려와 보살펴준다. 남편과 두 아이를 잃고 그녀 자신도 화재로 불구가 된 채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그녀를 사랑으로 돌봐주고 그녀에게 이 집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되찾아주기 위해 집안의 구조를 하나씩 개조해 나간다. 누군가 갓난아이를 그 집 앞에 버리고 가자 이 둘은 그 아이의 부모가 된다. 얼마 후 아나톨은 죽고 5년 후 친모가 나타나자, 프랑스와는 그 집을 모자에게 남겨주고 떠난다. 그 당시 5살이었던 아들, 피터는 아버지가 자신과 엄마를 버렸다고 평생 원망하며 살아온 터였다. 이제 모든 비밀은 이 건축가에 의해서 밝혀졌고 오해를 풀게 해준 피터는 이 건축가에게 그 집을 주려고 하자 ‘이 집은 내 집이 될 수 없고 피터 당신에게 주어진 집입니다. 당신 아버지 프랑스와의 사랑이 온 집안 전체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고 그 집을 떠난다.     처음에 주인공은 평범한 인간적인 욕심에서 그리고 건축가란 자만심에서 낡고 허술한 집을 저렴한 가격에 사들여 스스로 하나씩 자신의 힘으로 고쳐나갈 계획이었다. 그에게 건축가는 하나의 직업일 뿐이었다. 그는 이 소설을 써 내려가면서 공간이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그 공간에 사랑과 아픔, 관심과 성실, 기억 등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된다. 공간에 영혼을 담아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길이 아닐까. 건물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라면 그 건물 안을 채워 넣는 일 또한 우리 몫이 아닐까.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사랑 공간 아버지 프랑스 아들 피터 장편 소설

2025-01-13

[삶의 뜨락에서] 절망 다음은 희망

내가 나가고 있는 Y에 얼마 동안 공석이었던 요가 강사 자리에 샛별이 나타났다. 여느 직장에서처럼 일찍 정착해 오래 머무는 강사가 있지만, 2~3개월 만에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첫 수업 시간에 그녀는 머리를 올백으로 단정하게 빗어 묶고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의구심으로 가득했으나 고도의 몰입으로 한 시간의 클래스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누구도 그녀의 검은 안대에 대해 질문도 설명도 없이 거의 일 년이 지나갔다. 그녀 클래스는 나날이 인기도가 높아 회원 수가 계속 늘어나 이제는 하루에 두세 시간씩 가르친다. 가끔 멘트 중에 전문용어가 나와 그녀의 전직이 물리치료사임을 알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요가 강사와 학생의 관계는 얼마나 성의 있게 가르치고 얼마나 열심히 따라 하는가이지 그 이상의 질문은 사생활 침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요가를 끝내고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걷고 있었다. 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 용기를 내서 “혹시 사고로 눈을 다치셨어요?”하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안대를 벗었고 왼쪽 눈은 하얀 피부로 덮여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큰 상처가 난 오른팔을 보여주며 여기 피부를 떼서 눈두덩을 덮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래 눈꺼풀에 악성 암이 생겨 안구 속으로 계속 침범해 들어가고 암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 얼굴 전체로 전이되기 전에 안구 적출술이 최고의 선택이었단다.     너무도 솔직하고 덤덤하게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몸의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하게 다룰 수는 없지만 한쪽 눈을 잃는다는 사실은 어마어마한 상실이다. 아니 절망이다. 종종 시력을 잃어도 눈은 그대로 갖고 있지 않은가. 안구 적출 후 그 공간은 어떻게 되는가. 그녀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을 줬다. 인공눈 아니면 자신의 피부이식으로 그 공간을 덮는 경우, 그녀는 후자를 택했다.     평생을 물리치료사로 많은 환자의 재활을 도와주었던 그녀가 지난 일 년 동안 겪어야 했던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경험과 트라우마는 그녀를 아득하고 황망한 세계로 데려갔다. 처음에 시력을 잃고 눈을 잃고 격심한 통증에 신체적 이미지의 변화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내려가고 꺼져가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멈춰버린 지점, 절망의 뿌리에 몸을 비벼대던 찰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피어났다. 어쩌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그 임계점에서 가느다란 희망의 빛을 조우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한 자아의 본능이 아닐까. 다행이야, 운이 좋은 거야, 그래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건강한 눈이 있잖아. 만약 우리 몸에 하나밖에 없는 장기에 큰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절망인 거야. 희망과 긍정의 자세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니 아픔도 희열로 변화되어 갔다.     본인 스스로 열심히 재활에 참여했다. 첫 번째 부딪힌 장애는 한 눈으로는 원근감이 없고 몸의 중심을 잡는 데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원근감이 중요한 구기 종목 같은 운동은 상당히 어렵다. 그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요가, 필라테스 같은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운동 삼아 요가를 시작했으나 전직이 물리치료사였던 만큼 그녀는 신체를 단련해서 유연하게 만들고 녹슬지 않게 보존하는 그녀만의 클래스, 토탈 바디와 스트레치 클래스를 개발했다. 이 클래스는 가장 인기가 있다. 예약해야만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이다. 수술한 지 2년이 되어 가는 지금 그녀는 원근감도 재습득해 운전도 이제 익숙해졌고 평면의 세계에서 입체의 세계까지 한 눈으로 두 눈을 가진 사람과 동등한 능력으로 하루하루 감사하며 새로운 나날을 살고 있다. 그녀의 모든 클래스 마지막 5분은 항상 누워서 명상하게 한다. 각자 감사할 일을 찾아 스스로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도록 한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은 무한대이다. 역시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절망 희망 지점 절망 줄기 희망 스트레치 클래스

2024-12-30

[삶의 뜨락에서] 우리 동네 공원 이야기

우리 집 근처 공원은 6마일을 달리거나 걸을 수 있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도 많다. 새벽부터 달리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1마일쯤 가다 보면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한 바퀴 돌아 파킹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잠깐 사이에 할머니가 반바지 반소매 차림으로 나타나면 할아버지는 행복한 모습으로 할머니를 맞이한다.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는 달린다. 할머니 달리는 속도에 맞추어 자전거 속도를 지속한다. 할머니는 계속 말을 하고 할아버지는 듣는다. 듣다 보면 할아버지 웃음소리가 공원 전체를 움직이는 것 같이 큰 소리를 내면서 웃는다.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운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쳐다보고 아는 사람이 많아 인사하기 바쁘다.   1마일쯤 지나면 호숫가 옆을 지난다. 길이 두 갈래다. 호수 옆길은 산책로고 다른 길은 뛰거나 자전거가 지나간다. 산책길에 아주 젊은 청년이 발 운동 춤 연습을 하는지 같은 동작을 1시간 이상 연습한다. 발레니라 아니면 무용수인지는 몰라도 몸매가 뛰어나게 균형이 잡혀있다. 보기에 쉬운 동작인 것 같아 나무 뒤에 숨어 따라 해보려고 시도했다. 앞에 두 번 뒤로 한번 다른 발은 앞 한번, 뒤로 두 번 포인트를 찍는데 쉬운 동작이 아니었다. 아 그래서 전문적인 특유의 동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조금 지나면 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이곳에는 중년 남자분이 철가방에 공구를 잔뜩 집어넣은 가방을 열어놓고 만지작거리며 드론을 띄워 이리저리 내려왔다가 올라가고 한참 연습하더니 마음대로 이리 왔다 저리 간다. 그 옆에는 어린아이와 부모들 여럿이 모여 각자 연을 날리고 있다. 연이 서로 엉켜 떨어지면 다시 시도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힘차게 오르는 연을 쳐다보며 쾌감을 느끼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실을 풀었다 감았다 연속적으로 반복하는데 드론 하는 사람은 버튼만 한 번씩 눌러주는데도 속도가 빠르고 비행하는 것 같다.   그 옆 잔디밭에는 유럽 사람들의 축구 게임장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워도 더워도 일요일 9시에 모여 11시까지 축구를 한다. 한 사람도 낙오자 없이 열성적으로 공을 쫓아다닌다. 배가 불룩 나온 두 장년 아저씨는 양쪽 골문을 지킨다. 장갑을 끼고 열중하는 데 공을 잡지 못하고 그만 한 점을 내준다. 손뼉을 치면서 소리친다. 너무 재미있는 모습이다. 공이 산책길로 날아들었다. 내가 주워 힘차게 공을 찾는데 멀리 가지 않고 바로 앞에 떨어진다. 그사이에 그린 셔츠를 입고 훈련하는 마라토너들이 출동했다. 연습생과 선생들이 짝을 지어 달린다. 땀이 흘러 셔츠에 무늬를 그려낸다. 누가 구령을 외치는 것도 아니고 박자를 맞추라는 소리도 없는데 군대 사열하는 모습으로 앞으로 나간다.   공원을 빠져나오면 아주 큰 화원이 있다. 12월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크리스마스 위즈를 판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연 트리 파는 가게다. 가게 앞을 지나가면서 깊은숨을들이마셨다 내쉬면 콧속으로 스며드는 솔 냄새에 취한다. 아주 큰 컨테이너에 가득 실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가게 앞에 내려놓으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트리를 사 갔다. 추수감사절부터 팔기 시작하는데 작년에는 몇 그루 남기지 않고 그 많은 트리가 주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올해는 왠지 쓸쓸하게 서 있는 트리가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살기가 팍팍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밤에는 색깔별로 불을 밝히고 발을 동동 구르며 손님을 기다리는 주인이 트리 사이를 지나간다. 화원을 찾은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크리스마스 위즈를 고르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이야기 동네 할아버지 웃음소리 근처 공원 자전거 속도

2024-12-26

[삶의 뜨락에서] 유연함의 단호함

며칠 전에 손녀딸(4살 반)을 봐주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손재주가 제법인 그 애와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10대들 것이어서 재료의 양과 종류가 엄청나게 많았다. 디자인 샘플을 스마트폰으로 보아가며 차근차근 순서대로 엮어가던 중에 한 조각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완벽주의자인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고 있으니 “할머니 이걸로 대체하자. 그리고 I need a break, I'll be back”하며 자리를 뜬다. 4살 반짜리 여자아이의 현명한 결정과 행동에 고지식하고 유연성이 없는 이 할머니가 한 방 얻어맞았다.   일 년 전에 우리 온 가족 8명이 모였을 때가 떠올랐다. 쇼핑몰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 백화점(?)에 잠깐 들렀는데, 생전 처음 보는 아이스크림 종류와 토핑이 정말 1000가지도 넘는 듯했다. 어린이들을 유혹하기 좋게 사인과 벽화가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긴 줄에 서서 한참 동안 기다린 후 손녀 차례가 되었다. 판매원이 “What would you like?”하고 묻자 손녀가 “I want a brownie”한다.   “Excuse me?”하고 판매원이 다시 물으니 “I want a brownie” 단호하게 말한다.     큰 아이스크림 그릇에 조그마한 피스의 brownie는 정말이지 빈약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때 나도 배보다 눈이 고파 큰 용기에 여러 가지로 화려하게 장식된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그 크기에 압도당해 “할머니 것 좀 줄까?” 하니 “Nope” 하면서 단칼에 거절한다. 우리 가족은 물론 그 광경을 목격한 주위 사람들까지도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뺐다. 참 기특하고도 자신의 의사표시가 분명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한 살 때부터 데이케어에 다닌 그 애의 행동이 자신만의 개성인지 아니면 미국교육의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나이까지 살아온 나보다 유연함과 단호함을 갖춘 그 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 오전 요가 시간에 강사가 끝맺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여러분은 몸의 유연성을 위해 여기에 왔지만 이에 못지않게 마음의 유연성도 중요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 듯이 유연한 몸에는 유연한 마음이 깃듭니다.”   당연하고도 지당한 말이다. 바위는 세월과 풍파에 견디며 둥글어진다. 다시 말해 모난 부분이 곱게 다듬어진다. 우리 인간도 세월이 가면 둥글어지고 곱게 다듬어지는 걸까.     젊었을 때 많은 좌절과 번민으로 고통스러울 때 빨리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지혜로워진다고 믿었다. 살아보니 지혜롭다는 말은 다양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기 위한 요소 중에 유연성은 단연 으뜸이다. 교과서에 쓰여있는 대로 혹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밀고 나가면 현실과 많이 부딪히게 된다. 좌절과 실망이 심하면 절망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감이 없는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일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그렇다고 포기 후에 자책하고 자학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에는 항상 차선이 있는 법이다. 유연성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로 빠질 경우도 있다.     이솝 우화엔 이런 내용이 있다. 높이 있는 포도를 따 먹을 수 없을 때 '저 포도는 분명 신맛이 날 거야'라고 포기하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도 않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자기 합리화도 바람직하지 않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룰 수 없고 얻을 수 없고, 갈 수 없다면 목표를 바꾸거나 다른 길을 찾아 실현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람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고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누구나 좌절하고 견뎌야 하는 시간도 있게 마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번 선택한 삶을 끝까지 우기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 잘못도 인정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꿈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길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유연 단호 아이스크림 백화점 아이스크림 그릇 아이스크림 종류

2024-12-23

[삶의 뜨락에서] 한강 노벨문학상

2016년에 영국의 맨부커 상을 받았었을 때,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생육을 먹는’ 꿈을 꾼 후 주인공 영혜는 고기를 안 먹는다. 채식주의자가 된다. 형부는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영혜의 몸뚱이에 꽃을 그린다. 영혜는 자기 몸에 그려진 꽃을 보고서 자신을 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형부도 자기 몸에 꽃을 그린다. 영혜는 형부를 꽃이라고 여긴다. 처제와 형부는 알몸으로 서로 껴안는다. 이런 행위를, 영혜는 꽃과 꽃의 결합이라고 보았다. 형부는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한 행위로 보았다.     영혜 언니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영혜의 아파트에 온다. 남편의 예술작품을 본다. 작품 속에서, 남편하고 영혜하고의 섹스를 본다. 이것은 불륜(不倫)이다. 남편을 쫓아내 버린다. 그리고 영혜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병원에서, 영혜는 자기 자신이 나무라고 생각한다.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다. 양손은 뿌리다. 몸뚱이는 나무줄기다. 두 다리는 가지들이다. 나무는 물만 먹는다. 나무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녀는 나무이기에 음식을 안 먹는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영혜는 처음에는 고기를 안 먹는다. 채식하다가 꽃이 된다. 그리고 나무가 된다. 이처럼 채식에서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해놓은 소설 ‘채식주의자’를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올해에(2024), 전연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한강이 노벨상을 탔다. 하도 기뻐서 얼른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내용은 1980년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소설이었다. ‘정대’라는 소년이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었다. 정대의 시신은 다른 시신들과 함께 놓여있다. 정대의 유령은 자기 시신이 다른 시신들과 함께 군인 트럭에 실리는 것을 본다. 트럭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자기는 밑에서 두 번째로 깔려있다. 자기 위에 다른 시신이 놓여있다. 정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만, 사람들은 정대의 말을 듣지 못한다. 그는 답답해한다. 다른 유령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줄도 모른다. 당황해한다. 트럭은 숲속 어느 빈 곳에 멈춘다. 군인 상사가 시신을 끌어내리라고 명령한다. 휘발유를 뿌리라고 한다. 군인들은 시신에 불을 지른다. 시신은 다 타버린다. 정대는 소리 지른다. 육체가 없어졌으니, 나는 더는 정대가 아니구나. 어떻게 내 누이를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육체가 있어야 우리는 서로 알아볼 수가 있는데, 이제 육체가 없어졌으니, 누이가 나를 어떻게 알아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절망한다.   위의 소설을 읽어보고서, 한강의 사고방식이 아주 특이하고 독특함을 알았다.     한강이, 아니, 한국이 노벨상을 탄 것이 하도 자랑스러워, 어느 모임에서, 옆 사람에게,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탔어요!”하고 흥분해서 말했다. 그 사람이 “한강이 누군데요? 하고 반문한다. 말문이 확 막혀버린다. 더 놀란 일은, 스웨덴 한림원까지 가서 한강의 노벨상을 취소해달라고 시위까지 했다는 한국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한강을 좋아하니까, 모든 한국인이 다 한강을 좋아하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오스카의 최우수 작품상을 탔을 때는,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갖고서 즐겼었다. 그런데 이번 노벨상에는 왜 모든 한국인이 한마음으로 즐기지를 못하고 있을까? 조성내 /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임상 조교수삶의 뜨락에서 노벨문학상 한강 한강 노벨문학상 자기 시신 군인 트럭

2024-12-19

[삶의 뜨락에서] 사무라이

여행은 중독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금단현상이 온다. 아침마다 화려하게 차려진 뷔페 음식 대신 운동하러 나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다음 여행지를 계획하며 달랠 수밖에 없다. 여행지 선택도 전에는 가보고 싶은 곳이 우선순위였으나 이제는 멀고 힘든 오지를 하루라도 젊을 때 다녀오고 싶다. 몸이 가장 건강하고 편안할 때 어려운 환경에 처한 곳을 찾아보고 싶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다.     이번에는 일본, 태국 그리고 한국을 다녀왔다. 일본 여행은 그동안 원죄로 인한 배타심으로 꺼려왔었다. 하지만 이번에 용기를 내서 지금까지 내가 어른들한테서 혹은 학교에서 듣고 배운 것을 다 내려놓고 내가 직접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우리 일행은 뉴욕에서 인천공항을 거쳐 일본 항공을 통해 삿포로에 도착했다. 다른 항공은 위탁 수화물 제한이 23kg이지만 일본항공은 15kg 이어서 17일간의 여정으로 짐을 준비한 우리는 일본에 들어가기 위해 짐을 재정비해야 하는 고충을 겪어야 했다. 결국 일본인은 아담 사이즈를 선호하며 비행기 안의 공간도 낭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처음 방문지는 다테지다이무라로 사무라이 에도시대를 재현해 놓은 민속촌이었다. 직원들이 고유의상을 입고 그 시대 삶의 단면을 연극으로 보여주었다. 다만 홍보자료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연극도 일본어로만 진행되어 관객은 그 공연의 역사적 배경이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없어 아쉬웠다. 단지 상상 속에서 시간여행을 하며 각자 아는 만큼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첫날은 노보리베츠 마호로바 호텔에서 유카타(일본 실내복)로 갈아입고 호텔 안을 누비며 실내와 옥외 온천에서 몸을 풀었다. 유카타를 입고 들어간 식당은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있었고 우리 일행 100명은 각자 개인상을 받아 앉았다. 거기서 시식한 홋카이도의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광경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5성급 호텔인데도 객실이 모두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어 그들의 자긍심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날 호텔의 조식 뷔페는 바닷속의 생물을 다 끌어올려 온갖 재주와 공을 들여 차려낸 해물 백화점 같았다. 다음날은 도야호 유람선을 타기로 했으나 비가 온 관계로 대신 쇼와 신전과 사이로 전망대에 올랐다. 거기서 바라본 사방의 경관은 과연 우리 숨을 거의 멎게 했다. 다음 도착지는 지옥 계곡,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유황 냄새가 진동했다. 여기저기서 뜨거운 증기가 끓어올라 활화산으로 언제 용암이 분출될지도 모르는 은근한 생동감과 위험 사이를 줄타기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이 지옥 계곡이 열악한 환경이어서 생명이 살아남기 어렵다고 했지만 바로 옆으로 숲이 형성되어 있어 이 숲과 지옥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어두었다. 그다음은 오타루로 이동했다. 한때는 오타루 운하를 중심으로 큰 상권이 형성되었었으나 지금은 완전 관광지로 변해 오르골당(music box museum)은 관광객으로 붐볐고 과연 박물관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조그마한 예쁜 소품들의 집산지답게 기타이치기라스 공방에 들러 휘황찬란한 유리 공예품을 즐길 수 있었다. 상품 하나하나가 새끼손가락만 한데다 색상이 화려하고 포장 또한 섬세해서 어린이 머리핀 하나도 예쁜 색종이로 싸고 예쁜 비닐봉지에 넣은 후 리본으로 묶어서 다시 중간 사이즈 백에 넣고 마지막으로 상호가 적힌 큰 백에 넣어주었다. 그 포장하는 모습과 그 과정 자체가 행위예술이었다.     내가 경험한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성실했다. 그리고 그들은 당당했다. 하지만 영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서로 큰 불편을 느꼈다. 영어 발음이 무척 힘든 민족이다. 언제 그들은 영어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한 민족적 자존심을 내려놓고 세계적 공용어인 영어를 받아들일까 답답했다. 항상 지진과 쓰나미와 같은 재해를 고려해 건물은 낮게 짓고 한국인과는 다르게 집에 대한 집착이 없다고 한다. 그들은 살림은 간소하게, 가능하면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살자는 주의인 것처럼 보였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사무라이 사무라이 에도시대 여행지 선택 지옥 계곡

2024-12-16

[삶의 뜨락에서] 종은 다시 울린다

2019년 4월 노트르담 대성당에 불이 났을 때 놀란 파리 시민들은 성당 광장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첨탑이 무너지는 순간, 자기 몸이 타는 아픔을 호소했다. TV를 통해 이 비극적 화재를 지켜본 세계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충격에 빠졌다. 그 후 성당 복원 모금이 시작되었고 5년간의치열한 복원 공사 후 드디어 7일 성당은 우아한 옛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오는 토요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축제가 열리고 다음 날부터 일반인들은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교인들은 성당을 부활시킨 하나님에게 진정한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것이다. 나는 불이 나기 수년 전 무더운 여름 대성당 발코니에 올라가 광장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다음 파리를 찾으면 재단장한 사원을 방문해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릴 것이다.     1163년 공사를 시작, 1345년 문을 연 대성당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반기독교 사상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 모독을 당했다. 성당은 그 후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공사 중 벽돌 하나에서 ‘숙명(Fate)’이라는 글이 발견되었다. 개축팀은 이 불길한 벽돌을 치워 버렸다. 불이 난 후 노트르담 사원은 숙명적으로 불이 나 무너지고 다시 태어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좋아하지 않는 베스트 셀러, 댄 브라운의 ‘더 다빈치 코드’는 바티칸에서 일어나는 폭력, 부패, 비리를 묘사한 후 바티칸은 누군가에 의해 무너지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어디를 가든지 오래된 성당을 찾게 된다. 성당 건축에 대해 잘 모르는 내 눈에는 규모의 차이가 있고 건축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빼고는 그 차이를 알기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워낙 역사적으로 유명한 성전이기 때문에 들어가 머리를 숙인다. 성당은 관광객으로 붐빌 뿐 점점 교인이 줄어들어 나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자립이 어려워 발칸 여러 나라의 대성당은 정부지원에 의존하고 있다고 들었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를 읽고 북클럽에서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다음 몇 대사를 무척 좋아한다. 16살 집시 소녀, 이스메랄다가 홀연히 광장에 나타나 매혹적인 춤을 추고는 바람 같이 사라진다. 성직자가 위에서 바라보고 소녀의 아름다운 자태와 춤에 빠진다. 성직자의 고백, 네가 나타나기 전, 내 눈에는 하나님만 보였다. 이제 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너의 매혹적인 얼굴만 그리게 된다. 종지기 콰지모도는꼽추지만 동물적인 힘으로 사력을 다해 무거운 종을 울리고,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는 집시를 벽을 타고 내려와 구출한다.     소설에 나오는 그의 고백, 하나님 왜 나를 동물로 태어나게 하지 않으시고 한 여인을 짝사랑하는 인간으로 만드셨습니까. 집시 엄마는 딸이 광장에서 밧줄에 목이 매여 죽게 되었을 때 이렇게 절규한다. 내 딸을 살려 주세요. 신도 필요 없어요. 내 아이가 더 중요해요.     소설의 주제는 인간성이다. 작가는 신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말한다. 종교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할 것이다. 인간을 구제하고, 악에서 구출하고, 주어진 삶을 선하게 살다가 영생을 찾게 한다. 노트르담 사원의 화재와 재탄생은 사원의 ‘숙명’ 일지 모른다. 사원의 새벽종은 다시 우렁차게 울려 파리 시민뿐 아니라 전 세계인의 영혼을 각성시킬 것이다. 부활한 성전이 성령의 감화를 불러일으키기를 기도한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노트르담 대성당 여름 대성당 성당 광장

2024-12-04

[삶의 뜨락에서] 세월 따라 변하는 생각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시간의 흐름에 거슬러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우리의 몸이 우선 그러하다. 한동안 성장을 위해서 달려가던 육체는 이제 어느 시점을 지나면 성장을 멈추고 낡아가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노화로 통칭하는 이 과정이 언제 정확히 시작되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시작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천천히 망가지면서 여러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변화하는 것은 우리의 몸만이 아니다. 생각과 마음 정신 또한 예외가 아니다. 물론 아마도 생각건대 몸의 조건과 상태가 하락하기 시작하는 시점보다는 훨씬 늦은 때에 우리의 생각은 진화를 멈추고 망가지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어쩌면 육체와는 달리 정신은 끝없이 전진하고 전진할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이를 조금 먹은, 그러니까 이제는 상당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일 수 있다.   정신도 퇴락한다. 한동안 굳건했던 저 푸르른 마음도 아주 천천히 밀도가 떨어지며 소멸을 향해 달려간다. 하강이건 상승이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생각 또한 변한다. 물론 이는 때로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망아지처럼 아무 곳으로나 뛰어다니던 옛 시절의 마음과 생각에 그대로 변함없이 머무른다면 그 또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나이에 따라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변하는가.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가장 흔히 듣는 대답 중 하나는 경험의 양이 늘어가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더욱 포용하는 정신이 되고 더욱 허용하는 정신이 된다는 대답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이는 생각보다 드문 예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 어떻게 변해 나가는가.   우리 손님 중에 나이 드신 분들은 젊었을 때 입은 옷이 해어져 새 옷을 사 입었으면 좋겠는데 다 낡아빠진 옷을 가지고 와서 수선을 부탁한다. 수선하는 비용이 새로 사는 옷보다 많은데도 고집을 피우며 고쳐달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옷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새 옷보다 이 옷을 고집한다. 왜라고 다그치듯 묻는다. 아주 부담 없이 편하고 입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란다. 몇 달 뒤에는 또 다른 곳이 찢어져 가지고 왔다. 아무 말 없이 고쳐준다. 한두 손님이 그런 수선을 원하지만 보통은 새로운 스타일 옷을 사 입는다. 고집통 손님들을 보면 유행이나 시대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에 큰 흥미를 느낀다.   나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신발이 떨어져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고치면 발이 편하고 쪼이는 느낌이 없어 좋을 것 같아 구두 수선집을 찾았다. 우리 가게 근처에는 오랫동안 구두 수선을 해온 사람이 있었는데 은퇴한 뒤로는 가게 문이 닫혔다. 다른 사람이 가게를 인수할까 기다렸는데 열지 않았다. 친구 가게 근처에 구두 수선하는 곳이 있다기에 부탁을 해서 고쳤는데 발이 편하고 익숙해서 너무 좋다. 새 신발보다 부드럽고 볼이 늘어나 아프지 않아 편하다. 사람의 생각하는 의도가 변해야 이것저것 입어도 보고 신어도 본다. 꼭 그것에만 집착해 있으면 변화가 없다. 그저 편하고 귀찮다는 생각이다. 음식도 자꾸 새로운 것을 맛봐야 다른 느낌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식당을 가도 먹었던 것에 눈도장이 먼저 가니 그 순간부터 맛있는 새로운 것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래도 메뉴판 들여다보고 또 봐도 새로운 음식보다 그전 맛에 길들어 먹었던 것으로 주문하게 된다. 머리에 저장해 있는 생각이 변하지 않고 움직일 줄 모른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세월 생각 구두 수선집 마음 정신 한동안 성장

2024-12-03

[삶의 뜨락에서] 조용한 천재

‘채식주의자’를 내가 처음 읽은 것은 2016년 한강이 맨부커상을 받은 직후였다. 이 책은 한마디로 나를 깊은 충격에 빠뜨렸다. 작품의 소재, 아이디어 착상과 매듭 없이 매끄럽게 흘러가는 스토리 전개, 색다른 구성의 3부작 연작소설, 이 모두가 나를 흥분과 설렘의 장으로 몰고 갔었다. 이 책 내용을 지금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기에 당장에라도 독후감을 쓸 수 있을 정도다. 그 후 ‘희랍어 시간’, ‘흰’, ‘소년이 온다’ 등 한강 작가의 책을 거의 구입해 읽었지만 역시 나의 관심사는 정치나 이념이 아닌 ‘인간’이기에 이 책은 나를 많이 흔든 작품이다.     문학이 예술의 한 장르이면서도 ‘문학과 예술’이라고 사람들은 둘을 구분해서 말한다. 왜 그럴까. 보통 예술 즉 음악, 미술, 무용은 시공간 예술로 누구나 직접 보고 들으면서 가슴으로 느낀다. 그러나 문학은 다르다. 작가가 쓴 작품은 세계 공용어인 영어로 번역되어야만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해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을 꼭 읽고 독후감을 쓰고 있다. 한림원은 한강의 수상 선정 이유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시적 산문’이라고 밝혔다. 호사다마라 하였던가. 항간에서는(한국 사람들이) 이 책을 너무 외설스럽고 청소년에게 해가 되는 불량 책으로 받아들여 한림원 앞에서 이 상을 취하해 달라고 시위했다 한다. 통탄할 일이다.     천재는 보통 동시대인에게 외면당한다. 천재는 범인이 보지 못하는 그 이상을 본다. 창조는 자유로운 영혼에서 나온다.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정독했다. 작가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독자로서, 또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 선배 작가의 재능을 열린 눈과 마음으로 행과 연을 정성 들여 읽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영혜이지만 영혜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관찰될 뿐이다. 1부에서는 남편, 2부에서는 형부, 그리고 3부에서는 언니가 화자이다. 1부에서 평소 조용하고 평범한 영혜는 어느 날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 이유는 “꿈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꿈은 추상적이면서도 점차 구체적인 트라우마의 실체를 드러낸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잔인함과 가부장적인 폭력은 그녀의 명치 끝에 걸려 그녀에게 평생 고통을 준다. 결국 그녀는 채식을 선언한다. 2부에서 형부는 현대 예술을 하는 비디오 작가이다. 성실하고 생활력이 강한 아내를 둔 그는 최근 2년 동안 별다른 작품을 창작하지 못해 매일매일 방황하던 중에 우연히 아내로부터 처제에게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말을 듣게 되고 이 사실은 그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녀를 알고 싶다는 욕망과 자신의 열정이 창조해 낼 작품만을 위해 파멸의 길을 재촉한다.     채식주의자이며 식물 세계를 갈망하던 영혜는 자신이 스스로 식물 세계의 정점인 꽃이 된다는 환영에 들떠 몸과 마음을 슬며시 열기 시작한다. 밝은 연둣빛으로 남아있는 몽고반점을 중심으로 번져나간 가지들, 잎새들, 그리고 화려한 꽃잎들로 보디 페인팅을 한 후 형부에게도 꽃이 되어주기를 주문하며 그 후 꽃들은 교합을 이룬다. 이 둘의 파괴적인 열정에 부딪혀 태어난 예술작품의 결실로 영혜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형부는 폐인이 된다. 3부에서는 풍광 좋은 숲속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영혜는 날마다 먹기를 거부하며 마른나무가 되어간다.     비 오는 어느 날 그녀는 숲속에서 실종된다. 오랜 수색 작업 후 그녀는 땅에 물구나무서기로 머리를 박고 양 손바닥을 땅에 심은 뒤 가랑이를 벌리고 자연과 교감하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다. 포식 동물과 달리 햇빛만 받으면 살아갈 수 있는 나무가 부러웠던 영혜는 서서히 나무로 변해가고 있었다.     연작소설의 의미가 암시하듯 1부에서는 채식주의자를 선언하고 2부에서는 식물 세계의 정점인 꽃이 되었다가 3부에서는 결국 순한 나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선택한 영혜를 이야기한다. 다른 한편 작가는 언니인 인혜가 지켜보고 겪어가는 삶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고 또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인간의 멍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천재 식물 세계 보통 예술 시공간 예술

2024-12-02

[삶의 뜨락에서] 유연성(Flexibility)

며칠 전에 손녀딸(4살 반)을 봐주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손재주가 제법인 그 애와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십대용이어서 재료의 양과 종류가 엄청 많았다. 디자인 샘플을 스마트폰으로 보아가며 차근차근 순서대로 엮어가던 중에 한 조각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완벽주의자인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고 있으니 “할머니 이걸로 대체하자 그리고 I need a break, I’ll be back” 하며 자리를 뜬다. 4살 반짜리 여자아이의 현명한 결정과 행동에 고지식하고 유연성이 없는 이 할머니가 한 방 얻어맞았다.     또 한 번은 일 년 전에 우리 온 가족 8명이 올바니에서 모일 기회가 있었다. 그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 백화점(?)에 잠깐 들렀는데, 생전 처음 보는 아이스크림 종류와 토핑이 정말 1000가지도 넘는 듯했다. 어린이들을 유혹하기 좋게 사인과 벽화가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긴 줄에 서서 한참 동안 기다린 후 그 애 차례가 되었다. 판매원이 “what would you like?” 라고 묻자 “I want a brownie”한다. “Excuse me?”하고 판매원이 물으니 “I want a brownie” 단호하게 말한다. 큰 아이스크림 그릇에 조그마한 피스의 brownie는 정말이지 빈약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그때 나도 배보다 눈이 고파 큰 용기에 여러 가지로 화려하게 장식된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고 그 크기에 압도당해 “할머니 것 좀 줄까?” 하니 “Nope” 하면서 단칼에 거절한다. 우리 가족은 물론 그 광경을 목격한 주위 사람들까지도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뺐다.     참 기특하고도 자신의 의사표시가 분명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한 살 때부터 데이케어에 다닌 그 애의 행동이 자신만의 개성인지 아니면 미국교육의 결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나이까지 살아온 나보다 유연함과 단호함을 갖춘 그 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 오전 요가 시간의 끝맺음으로 ‘오늘 여러분은 몸의 유연성을 위해 여기에 왔지만 이에 못지않게 마음의 유연성도 중요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 듯이 유연한 몸에는 유연한 마음이 깃듭니다.’라고 강사가 말한다. 당연하고도 지당한 말이지만 한번 다시 숙고해볼 만하다. 바위는 세월과 풍파에 견디며 둥글어진다. 다시 말해 모난 부분이 곱게 다듬어진다. 우리 인간도 세월이 가면 둥글어지고 곱게 다듬어지는 걸까. 난 젊었을 때 많은 좌절과 번민으로 고통스러울 때 빨리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지혜로워진다고 믿었다. 살아보니 지혜롭다는 말은 다양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기 위한 요소 중에 유연성은 단연 으뜸이다. 교과서에 쓰여있는 대로 혹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밀고 나가면 현실과 많이 부딪히게 된다. 좌절과 실망이 심하면 절망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감이 없는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발버둥 치는 일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그렇다고 포기 후에 자책하고 자학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에는 항상 차선이 있는 법이다. 유연성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지나친 자기 합리화로 빠질 경우도 있다. 높이 있는 포도를 따 먹을 수 없을 때 ‘저 포도는 분명 신맛이 날 거야’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도 않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자기 합리화도 크게 바람직하지 않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이룰 수 없고 얻을 수 없고, 갈 수 없다면 목표를 바꾸거나 다른 길을 찾아 실현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람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고 우리 모두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누구나 좌절하고 견뎌야 하는 시간도 있기 마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한번 선택한 삶을 끝까지 우기는 것이 아니라 도중에 잘못도 인정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세상에는 꿈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길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flexibility 유연성 아이스크림 백화점 아이스크림 그릇 아이스크림 종류

2024-11-18

[삶의 뜨락에서] 마라톤, 즐기면 힘들지 않아요

뉴욕시티 마라톤 19번째 출전이었다. 출전번호 12491. 아침 5시에 자이언트 스타디움에서 버스를 타고 스태튼 아일랜드 베라자노 브릿지 밑에서 모였다. 15번 이상 참가자는 우대해준다. 벌판에서 떨지 않고 건물 안에 들어가면 커피, 따뜻한 물, 베이글까지 준비되어 기다린다. 50여명 넘는 사람들이고 48번 완주한 사람도 있다. 거의 20번 이상의 노장들이다. 그래도 젊은 사람 못지않게 건강해 보였다. 특혜는 11시 30분까지 기다리지 않고 9시 10분 첫출발을 한다. 기다리는 것도 지겹지만 7시간을 달려야 하는 나는 오밤중에 센트럴 파크에 도착한다. 그 고통을 덜어주니 기다리는 가족도 훨씬 가벼운 마음이고 나 또한 햇볕이 있을 때 끝마치니 홀가분한 기분으로 출발한다. 엄청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면 썰물 빠지듯이 베라자노 브릿지 중간쯤이면 나 혼자 달린다. 이 넓은 다리가 완전히 내 차지다. 어느 누가 이 다리를 혼자 뛰면서 지나가겠는가.   브루클린 4가 중간쯤 가면 9시 45분 출발 팀이 지나간다. 힘이 넘치는 젊음과 바위도 쪼갤 수 있는 파워가 넘친다. 여자 선수들은 날씬한 다리에 포니테일이 박자를 맞추듯 출렁거린다. 이 팀은 마라톤의 진수를 보여준다. 구령을 외치는 사람도 없는데 박자를 척척 맞춰가며 팀을 만들어 군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이 달린다. 외국에서 온 선수들도 많다. 속도가 같은 부류들이 셔츠에 자기 나라를 표시했다. 한 번쯤 뉴욕 마라톤 참가를 원하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달린다. 늦게 출발했지만 속도가 빨라 나 혼자서 달리는 일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커스텀이 많이 보였는데 이제는 운동복을 입고 뛴다. 그리고 외국 선수들도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은 드물고 모두가 젊은 청춘들이다.   달리고 있는데 다운 신드롬이 있는 학생과 같이 달리게 되었다. 묵묵히 앞만 보고 달린다. 길가에서 방울을 흔들며 목이 터지라 응원을 해준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해달라고 애원하면서 “You can do it, You are the best. Go”를 외쳐준다. 퀸즈 브릿지를 지나 1Ave65가에 들어서면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고막이 터질 듯이 우렁차다. 75가에 우리 식구들이 모여 있다. 콜로라도에서 동생과 조카 2명 그리고 조카 아들딸까지 대식구가 기다리고 있다. 할머니를 응원하기 위해서 자리를 잡고 혹시나 찾지 못할까 설레면서 기다리다 내가 나타나니까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고함을 질러댄다. 몇 분 만나서 응원하려고 먼 곳에서 온 동생 식구들의 박수와 환호 소리에 에너지를 듬뿍 받고 달린다.   뉴욕 마라톤 클럽에서는 선천적 장애인과 후천적 장애인들을 전문가의 도움으로 훈련한다. 특히 정신적 장애인은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서 지속해서 훈련을 반복하며 마라톤에 출전시킨다. 그들을 뒤따라가면 왼쪽 오른쪽에 가이드가 있고 한쪽 손목과 가이드 손목으로 줄을 이어 놓았다. 물이 먹고 싶다면 물을 주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화장실을 같이 간다. 가다가 짜증을 내면서 뛰지 않겠다고 길가에 더럭 주저앉기도 하고 팔을 뿌리치면서 울기도 한다. 울면 같이 울고 성질부리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달래고 얼리면서 앞으로 나간다. 어려운 고비마다 길가에 나와 있는 관객은 더 힘찬 박수와 딸랑이를 흔들면서 “You can do it”을 외친다. 다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면 “Good” 하면서 응원석에서도 달랜다. 그는 혼자가 아닌 모든 사람과 함께 한다는 공동의식을 느낀다. 장애인을 지도하며 교육하고 연습을 반복하는 이 어려운 과정을 뉴욕 마라톤 클럽에서만 하고 있다.   26마일은 나와의 긴 싸움이다. 시간 단축하려고 무리하지 않으면 연습한 데로 내 몸의 여건에 맞추어 달리면 그리 힘들지 않다. 여러 사람의 제각각 다른 점을 보면서 달리면 7시간이 그리 길지 않게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다. 이튿날 우리 가게 손님이 인스타그램을 가지고 왔다. 내가 웃는 모습으로 종착점에 들어오는 것을 찍은 사진이다. 손을 번쩍 들고 자연스럽게 잘 찍힌 사진이 어느 수퍼 스타와 비슷하다고 농담도 한다. 다른 손님은 꽃을 사 들고 와서 격려해 주었다. 양주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마라톤 뉴욕시티 마라톤 뉴욕 마라톤 후천적 장애인들

2024-11-14

[삶의 뜨락에서]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2)

지난겨울 모로코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당나귀가 짐을 나르는 좁은 골목 안의 작은 가게들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붐볐다. 멜랑꼴리하고 구슬픈 노랫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루에 다섯번 간격으로 들리는 이 노래는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물건 파는 것도 잠시 중단한 채,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깊은 절을 올렸다. 나는 단순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엎드려 기도하는 그들에게서 가슴 뜨거워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왔다. “신앙이란 자기 자신의 유한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초월하려는 정신의 개방이다.”라고 한 에디트 슈타인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갖기 이전에, 무엇을 갖느냐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여유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은퇴하고 난 뒤의 나의 생활도 더 바빠지고 있다.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의 책 ‘월든’에서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차분히 인생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성조 아브라함, 야곱, 요셉, 이집트 탈출, 바빌론 유배에서 예루살렘의 귀환, 로마제국의 기독교 탄압,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요한 8, 24-25)     수녀님의 지도, 그리고 필요한 것을 미리미리 알아 챙겨주는 이해심 많고 에너지 넘치는 길잡이님의 사랑과 함께 12명의 자매님이 하느님 앞에서 가슴 졸이고, 망설이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때로는 수줍어하면서 지냈던 그 많은 시간은 밤하늘의 샛별처럼 빛나는 순간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10월도 중반에 들어선 가을의 끝이다. 온통 붉게 물들어가는 숲속을 걸으며 3년 전 가을, 백주 간 성경 통독을 위해 퀸즈의 베이사이드 성당으로 찾아갔던 그 첫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너도 떠나고 싶으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도 들려온다. 주님 제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기억 모두 하느님 자연주의 철학자 가을 백주

202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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